정서(L'affectivite) : 쾌락과 고통, 즐거움과 행복
1. 정서와 심리학적 설명
랄랑드(Lalande): '쾌락, 고통, 흥분의 류적(generique)인 특성을 정서상태라고 한다. 이 상태들은 주체가 체험한 상태이다. 쾌락과 고통은 보다 단순한 것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2. 쾌락과 고통: 육체적인 차원과 도덕적인 차원
* 육체적인 쾌락과 고통은 공간에 위치하며, 도덕적 차원의 쾌락과 고통은 시간 속에서 체험된다.
라벨(Lavelle, 1883-1951): 육체적인 고통은 공간 속에 위치하며 도덕적 고통은 시간과 관계가 있다.
리보(Ribot, 1839-1916): 형이상학적 불안과 치통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한다.
* 상상의 고통과 공상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douleur)과 도덕적인 괴로움(souffrance)은 혼합되어있으나 구별된다.
육체적인 쾌락과 고통은 육체와 연관 있다.
알랭(Alain 1868-1950)의 『행복론(Propos sur le bonheur)』에서,
"고통스런 기다림이나 괴로운 추억과 같은 상상의 괴로움은 공상적인 괴로움에 가깝다"
에피큐로스(Epicure 341-270)의 죽음의 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어느 정도 코미디이다"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 1903 ): "성인을 제외하면 참된 고통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다."
샹포르(Chamfort, 1741-1794) "하느님 나로 하여금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소서! 도덕적인 고통은 제가 감당하겠나이다."
+ 우리는 육체적인 쾌락과 고통만을 분석하자.
3. 전통적인 관점 :쾌락과 고통의 대립
플라톤(Platon 425-384)의 『파이돈(Phedon)』에서
소크라테스는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참된 쾌락을 체험한다. 이 경우의 쾌락은 쇠사슬 때문에 가해진 고통의 중지(cessation)속에 있다.
에피큐로스: 쾌락은 고통스런 동요의 부재(absence)이다. 가장 달콤한 괘락은 휴식(en repos)이다.
그가 메네세(Menecee)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신이 정신을 동요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인간 행복의 절정이 아닐까" 즉 아타락시아, 신중한 생활, 고통의 기회를 모두 피할 수 있는 금욕적인 생활을 권장한다.
쇼펜하우어(Schpenhauer, 1788-1860): 모든 필요는 괴로움이며, 소유하는 쾌락은 괴로움의 부재로 환원된다. 쾌락은 괴로움의 부재(l'absence de souffrance)이다.
불교: 행복은 괴로움이 정지된 형태이며, 이 정지가 완성된 것이 열반(Nirvana)이다.
4. 고전적 개념에 대한 비판: 아리스토텔레스와 프라딘느
쾌락은 고통의 부재
플라톤은 『필레보스(Philebe)』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필요와 고통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육체적인 만족의 추구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다."
에피큐로스: 아타락시아(ataraxie), 평온한 무관심의 이상, 번뇌도 욕망도 없는 이상에 만족하게 하려는 것이다.
+ 고전적 이론들은 근엄한 고전주의자들의 약간 위선적인 이론으로 비친다.
프라딘느(Pradine, 1874-1958): "필요(un besoin)를 없애는 것과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구별한다. 그래서 쾌락과 고통은 각기 다른 심리 기능에 속한다고 분석한다.
1) 쾌락(le plaisir)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384-322)는 『니코마쿠스 윤리학(Ethique a Nicomaque)』에서, 쾌락은 순수한 수동상태이며, 고통의 단순한 정지가 아니다: 쾌락은 능동적 활동의 끝마무리이다. 그래서 쾌락의 추구는 살려는 욕구와 혼합되어 있다.
프라딘느(Pradine): 쾌락이 필요감각에 속해있다. 쾌락의 경우에는, 정서가 활동을 완성하고 장식한다.
2) 고통(la douleur)
쾌락은 대상을 향한 충동(impulsion)의 성공의 표시이며, 고통은 장애물의 제거(expulsion)에 선행한다.
쾌락은 필요감각들과 관계가 있고, 고통은 방어 감각들과 관계가 있다.
기계론자들은 프라딘느의 이분법에 반대한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성향도 고통에 의해서 결정되는 반사작용에 속한 것이라 한다.
프라딘느의 기계론 반박: 소화기 계통의 신경이 절단된 동물은 배고픔 때문에 고통을 받지는 않지만 영양섭취의 필요는 느낀다.
5. 고통의 문제
* 고통은 제6감(sixieme sens)인가? [위치적 탐구(localisation)]
생리학자들의 정설: 자극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감수기(recepteur sensoriel)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어 고통이 생긴다.
폰 프라이(von Frey, ?): 고통은 제6감일 것이라 생각했다. 고통감각에는 특수 감수기들이 배열되어 있다고 보았다.
+ 고통은 생리적 기능이다.
척추병 환자, 독극물, 마약(코카인)의 경우에 고통감각을 없앤다.
* 고통의 생물적 기능에 대하여 [기능적 탐구(fonction) - 반복, 적응]
고통은 생물적 기능이다. 생물이 피하고 싶어하는 기능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쾌락은 어떤 기능의 성취를 표현하며, 고통은 생명의 위험을 알려서 구제책을 찾게 한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생물에게 유용한 것
* 고통의 생물적 기능에 대한 반박
우선, 고통의 강도는 고통이 알려주는 병의 강도와 다르다.
만일 고통이 예고라면 이 예고는 고통을 가하여 병을 알려주는 야만적인 예고이다.
고통을 동반하는 잔인한 부차적인 증세가 없어도 방어반응을 하는 체계가 있을 수 있다.
* 프라딘느 이론: 고통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뜻밖의 결과이다.
프라딘느: 생물의 감수성이 점점더 섬세해지는 예고감각의 측면에서 발전해 왔다.
감각에서는 인상적인 것이 줄어들고 표현적인 것이 늘어나게 되었다.
고통은 본성이 원한 것이 아니라 진화과정에 나타난 것이다.
르리슈(Leriche)
고통은 생물적으로 유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병리적(pathologique) 현상에 불과한 것을 생리적physiologique) 차원에 반영시키는 사람들이다."
6. 고통(la souffrance)과 악(le mal): 형이상학적-도덕적 문제
* 고통의 부정
신학자의 경우: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했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고통을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스피노자(Spinoza 1632-1677): 고통을 "보다 덜 완전한 것으로의 이행", 즉 능력의 감소나 실패의 표시이라 보았다.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의 문제이다
스토아철학은 고통을 단순한 대상이라 생각한다.
스피노자: 우리는 지성을 실천함으로써 고통을 지배할 수 있다. 정서는 사유가 없는 두려움이다. 정서에서 벗어나려면 '만물의 연관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은 실체의 관점, 즉 전체의 관점에 서서 사물들은 대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라슈리에(Lachelier, 1832-1918) "고통의 의식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이다"
+ 현대에는 고통을 부정하는 대신, 경제적, 약학적, 외과적인 기술을 통해서 실제로 제거하려 한다.
* 고통의 이용
막스 쉘러(Max Scheler, 1874-1928): 고통을 부정하는 이론과 정신적 완성을 위하여 고통에 침투하고 고통을 심화시키는 이론을 대립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 1821-1881): 고통은 자아 의식의 근원이다. 고통은 자아의 무능력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무능력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라벨(Lavelle, 1883-1951) 쾌락은 세계와 우리의 조화상태.
베르그송(Bergson, 1859-1941): 쾌락 속에도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본능이 지식이 된 형식일 것이다. 본능은 대상과의 융합, 대상과의 동일화이다. 이와 반대로 고통스런 의식은 주체를 주체 자신에게 나타낸다.
도덕론자들 고통을 통해서 인격의 완성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속죄론과 정화의 고통론: 고통은 잘못을 속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무의식적인 가책 때문에 병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정신분석가들이 말하는 자기징계(autopunition)의 메카니즘이 이런 경우이다.
금욕론 : 막스 쉘러(Scheler)의 경우
금욕주의자는 고통을 영혼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의 시련은 타자에 대한 사랑을 준비하는 것이다.
* 고통에도 의미가 있는가?
속죄의 고통 :
고통을 받음으로써 악을 치료할 수는 없다.
금욕론 : 성자 안토니우스(St Antoine, 251-356)
금욕을 하는 사람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힘을 자기 자신과 투쟁하는 데 소비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구스타브 티봉(Gustave Thibon, 1903- )
고통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천국이나 지옥을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지상을 비우는 상처이다.
7. 쾌락, 즐거움, 행복
쾌락은 잘 적응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며 성향이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벤담(Bentham 1748-1832)
행복을 우리의 삶 전체에서, 쾌락의 최대한의 총계에서, 고통의 최소한의 총계를 제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1) 쾌락(le plaisir)의 본성
쾌락은 이런저런 성향이 만족되었다는 표시이다.
쾌락은 순간적인 체험이며, 정신적인 시간이 지속되지 않는 감정의 영역에 속한다.
인생은 순간의 연속이며 지속성이 없는 쾌락들의 집합일 뿐이다.
2) 환희(la joie)
쟝 라크롸(Jean Lacroix, 1900-)는『쾌락, 환희, 행복(plaisir, joie, bonheur)』에서
환희는 리듬을 즐기는 것이다.
환희는 순간을 초월한 이상과 시간에 속해 있는 실현을 결합하기 때문에 리듬이다.
지루함은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소유되는 것
베르그송 즐거움이 있는 곳에는 창조가 있다.
3) 행복(le bonheur)
행복은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
스피노자: 행복은 존재의 무한한 즐거움(희열 juissance)이다
말브랑슈( Malebranche): 행복은 휴식이다. 행복은 신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 행복은 영원이나 신에게 속한 것이고, 쾌락은 순간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동물적인 차원의 삶에 있는 것이다. 즐거움은 시간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즐거움만이 인간적인 것이다.
Resume
전통적으로 쾌락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거나 부정적으로 정의하려한다. 이는 도덕적 삶의 방식을 생물적이고 생리적인 방식으로 되돌리지 않으려는 않는 이유에서 나왔다. 에피큐로스가 말한 괘락은 고통의 부재라는 것도 이런 논리에 근거한다.
다른 한편 고통을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리학자는 고통이 있으니까 고통을 멀리하려고 하듯이 고통에는 자연 예고적 기능이 있다고 한다. 도덕론자도 도덕적인 고통은 잘못에 대한 효과적인 속죄라고 보았다.
고통을 부각시키려는 발상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있다. 프라딘느 (Pradine)경우는 쾌락과 고통은 상호 부정적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고통의 유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통이 가해지지 않는 자연의 방어체계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은 진화의 간접적 결과물이라 보았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고통에도 정확한 목적이 없다고 보는 측면에서 도덕적 고통이 정신적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 정신적 발전을 포기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정서로서 쾌락 환희 행복을 라크롸(Jean Lacroix)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쾌락은 순간적이지만 환희는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행복은 영원의 관념과 관계있으며, 그래서 행복은 인간이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유에는 완전한 존재가 시간 초월적이며 영원하다는 고전적 존재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하는 존재는 시간의 내재성을 함축하고 있으면서 현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존재의 과정 전체에 대한 공감과 직관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다른 한 방식이다. 그래서 신비주의에서 행복의 황홀경에 이르는 두 가지 방식에도 전자의 초월적 완전자로 합일에 이르는 엑스따즈(extase, 무아경)의 길이 있고 후자의 내재적 합일을 이루는 엉다즈(entase, 몰아경)의 길이 있다.
# by 북극성옆작은별주인 | 2006/11/20 2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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